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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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여자 경찰서장이었던 여사는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 YWCA를 창설, 여권운동과
사회사업에 전념하던 중 6.25를 맞았다. 6.25는 여사의 삶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다 주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을 부민동에 있던 마구간을 빌려 수용, 자매여숙을 차렸다.
아이들의 수가 점차 불어나자 서구 괴정동 428일대 국유지를 불하 받은 후
57년 고아원과 겸하는 정신요양원을 설립했다.
고아원 여자아이 가운데 정신질환 아이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거리엔 전쟁의 상혼으로 정신이상이 되거나 남편이나 시댁으로부터 버림받아 길거리에
떠도는 부녀자도 많았다.

1960년 자매여숙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여사의 전 재산과 기독교단체의 후원, 미군의 물자원조로 원생들을
키워낸 여사는 먹을 게 모자라면 청과시장에서 시래기를 주워다 죽을 쑤기도 했다.

근엄하고 자주적인 모습과 천진하고 투명무색한 모습의 양면성을 지니고 항상 기개 당당했던 여사는
원생들 앞에서만은 기가 죽었고 한달에 보름이상은 정신질환자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잤다.
슬하에 4천명 가까운 고아와 질환자를 거둬낸 양여사는 67년 용신봉사상, 76년 국민훈장 동백상 등 많은 표창을
받았으나 여사는 상받기를 꺼려했고 사진찍기도 싫어했다.

당대의 최고 엘리트로서 기득권층이 누릴 수 있는 영예와 부귀를 마다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온갖 허드렛일을
감당하며 정신질환자들과 함께 살다간 양한나 여사 옛모습 그대로인 허름하고 초라한 본관 건물 앞쪽에,
죽어서도 이 자매여숙을 품고 가고 싶다고 말한 여사를 기리는 추모비가 옛 주인이 그리운 듯 목을 뽑고
자라난 풀잎들 사이에 숨은 듯 서있다. 마치 자매여숙을 지키기라도 하듯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여성환자만을 수용남자환자의 경우 아내와 자녀들이 입원비를 지불하지만
여자의 경우는 가족의 수치라 여겨 알리고 싶어하지 않고 시댁이나 친정에서 버림받고 이혼당하기 일쑤이다.
구사일생 한번 나면 한번 죽는 것이니 구질구질하지 말고 멋지게 살다가겠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는 여사는
76년 6월 멋진 인생을 마감했다.
경남 기장 만하리 부산진교회 묘지에 묻힌 여사는 지하에서도 자매여숙의 성장과 발전을 기원하리라.

고양한나여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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